제목: (펌) 이 눈이 그치면 더디게 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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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5-09-20 00:53
조회수: 3057


이 눈이 그치면 더디게 봄이 오겠지
옛길 기행 - 마구령
    김남희(freesoul) 기자    



▲현정사 지나 영월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외딴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 연기가 펄펄 끓는 아랫목을 생각나게 한다. ⓒ 김남희


길은 우리의 꿈이다. 그러기에 옛길은 잊혀진 꿈이자, 스러져간 희망이다.
속도와 생산성의 기치 아래 잊혀지고 허물어진 옛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지나간 꿈을 복원하고 되살리는 꿈꾸기의 과정이다.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 찍어 놓은 어떤 연대감의 자취 같은 것'이라고 했던가.

눈발이 비듬처럼 어깨 위로 성기게 떨어지는 토요일 아침.
먼저 간 이들이 남겨 놓은 기억의 자취를 찾아 떠난다.

소백산 국립공원의 동쪽 끝자락인 마구령을 넘어 강원도 영월로 이어지는 20km 남짓의 비포장 길.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에서 길은 시작된다.
길은 우리의 기대를 배신한 채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양편에 사과밭을 끼고 뻗어 있다.
등산화의 끈을 조이고, 배낭을 들쳐메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소백산 국립공원 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고 나니, 그제서야 길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맨 몸으로 붉은 살을 드러낸다.

  
▲역시 현정사 지나 영월로 가는 길목의 눈 덮인 흙길. ⓒ 김남희

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뱀처럼 구불거리며 천천히 몸을 틀어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잡목숲은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에 젖고, 앞서간 사람의 희미한 흔적이 아직 녹지 않고 눈 위에 남아 있다.
누구였을까. 이른 아침에 이 길을 혼자서 걸어간 이는.
마른 바람에도 술렁이는 그 어떤 허술한 가슴이 있어, 눈 내리는 이 길을 혼자서 넘어갔을까.

사위는 정적에 싸여 있다.
자동차의 속도와 매연,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야 하는 사람의 물결과 소음.
익숙하던 도시의 흔적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산과 하늘과 숲과 바람은 침묵 속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별 말 없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걷고 있다.
내게는 침묵을 즐길 줄 알며, 정적을 곤혹스러워하지 않으며, 걷기를 즐기고 예찬하는 벗이 있어 짧은 길떠남을 풍요롭게 해준다.
'언어는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으며 대화는 우리를 풍경으로부터 떼어낸다'.
적어도 우리가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 갈 때는 고집스레 침묵을 지켜도 되지 않을까.
가끔은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이 말해지는 법이다.


▲노루목 마을 남대천의 나무다리를 건너면 김삿갓 묘역으로 들어선다.(사진 왼쪽) / 마대산 오르는 길의 계곡. ⓒ 김남희


▲남대천 전경. ⓒ 김남희

마구령 고개에 올라서니 해발 810m.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거칠 것 없이 시원하다.
길은 이곳에서 갈라져 비로봉과 고치령, 늦은 목이와 선달산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눈발은 계속 날린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우리는 길 한편에 자리를 잡고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인다.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으로 눈발은 자진(自盡)하고, 길은 경계를 지우며 하얗게 덮여 간다.
뜨거운 국물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여전히 우리는 다른 이와의 우연한 마주침도 없이 온전히 길을 차지하며 걷고 있다.
먹이를 찾아 내려온 산짐승들의 작은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다. 그 옆으로 나란히 찍혀 가는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

남대리 주막거리에 도착하니 오후 두 시.
이곳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그리고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가 만나는 삼도의 접점 지역이다. 소백산이 끝나는 곳에서 태백산이 시작되는 곳이자, 단종을 복원시키려다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머문 곳이라고 한다.


▲김삿갓이 숨어 살았던 집터가 있는 어둔리 선낙동 가는 길에서 보는 산줄기. ⓒ 김남희

 
ⓒ 김남희

이 길이 아직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던 시절, 삼도에서 넘나들던 이들이 만나는 길목이었기에 나그네의 발을 붙잡던 주막도 있었을 테고, 그랬기에 주막거리라고 불리던 곳이다.
어쩌면 좌절된 꿈을 한 잔 탁주에 풀어 넣으며 시절에 울분을 토하던 가슴들도 있었을 테고, 청운의 꿈을 품고 대처를 향해 나가던 설레이던 가슴들도 머물렀을 테지.
이제 예전의 번성함은 안내문 속의 글귀로 남아 있을 뿐, 겨울 벌판에는 바람을 맞으며 몇 채의 집들이 쓸쓸히 서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현정사다.
현정사는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각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참선도량이다.
어래산 자락에 자리잡은 절은 작지만 제대로 지은 절임을 건축을 전혀 모르는 이조차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낡고 오래된 것이 주는 정겨움은 없지만, 요란스럽게 치장하거나 크기를 자랑하지 않은 절이 주변의 환경과 잘 어울리며 서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서니 삼면이 트여 있어 산자락과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모처럼 절 앞에 늘어선 기념품 가게도 없고, 그 흔한 식당이며 여관 하나 보이지 않는 작고 어여쁜 절집을 만나 마음이 흐뭇하다.

스님들이 동안거(冬安居) 중이라 고요한 절을 빠져 나와 다시 걷는다.
이곳 남대리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곳이다.
마을은 한 눈에 보기에도 쇠락하고 있다.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쓰러져 가는 집들이 대부분이고 폐가의 분위기를 풍기는 집들도 간혹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빨리 늙는다.

이곳에서 다시 길을 묻는다.
김삿갓 마을까지는 얼마나 남았냐는 질문에 노인이 대답한다.
"얼마 안 남았소. 한 10리 가면 될런가."
한 시간을 넘게 걸어도 길은 계속된다.
알고보니 현정사에서 삿갓 마을까지는 7km가 넘는 20리 가까운 길이다. 급할 것 없는 시골 사람들의 시간과 속도개념이 노인의 대답 속에 드러난 것 같다.



▲제 얼굴에 허락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무례한 길손을 쳐다보는 누렁소. (사진 왼쪽) / 가마솥과 아궁이. ⓒ 김남희


▲흙담과 분홍색 커튼이 정겹다. ⓒ 김남희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끝나는 곳이다.
세상을 등지고 삿갓을 쓴 채 천하를 헤매고 다녔던 김병연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앞으로는 남대천이 흐르고, 해발 1020m의 마대산이 왼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금성대군과 김병연이 수 백년 전 이 길을 오갔고, 오늘에 이르러는 파란 눈의 스님 현각이 이 길을 걸어 왔다.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 길 위에 흘리고 가는 꿈 한 자락은 또 무엇인지.

마대산 오르는 길에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끝없이 이어진 길.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나를 끓어오르게 했던, 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유혹.
'세상의 아득한 저 끝에 대한 꿈은 언제나 사납고 매혹적인 법'이라지.
얼마나 더 걸어가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늘 50리를 걸으며 내가 만난 이 땅의 풍경들.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멀리 남아 있어도 괜찮은 것이다.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긴 노동과 노력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대지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위해서보다는 우리의 두 발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우리에게 몸이 있는 한 그것을 써먹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눈이 그치고 나면 더디게 봄이 오겠지.
어린 아이 속살 같은 여린 잎들이 돋는 날에 다시 이 길을 걷고 싶다.


▲버들고개에서 내려다보는 노루목 마을 . ⓒ 김남희




여행기 중 작은 따옴표 안에 있는 글은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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