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폭설 내린 월정사 숲길에서 판타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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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1-12 00:00
조회수: 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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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되어도 좋으니 눈이나 펑펑 내리라던 뱃사공의 마법주문이 효험을 발휘하여 기어이 폭설이 내리고 말았다.
아침잠을 깨우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커튼을 치우니 창밖은 이미 별천지.
'순백의 세상'이라는 밋밋하기 이를데 없는 말로 밖에는 표현키 어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여, 마음이 바빴다.
월정사를 가야한다는 생각에.
평창에 불시착한 후, 눈이 오는 날이면 월정사 숲길에 가야한다는 강박인지 뭔지 모를 의무감은 나의 습관이 되었다.
예약을 한 손님이 있어 펜션 앞 언덕길을 허리가 빠지도록 허위허위 눈삽질을 하느라 땀은 범벅이 되고 안경알은 허옇게 김이 서렸지만, 난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힘들지만 기분은 좋았던거다. 이유없이.
마치 연애할때 처럼, 고통과 희열이 동시상영 되었다.

날이 게인 다음날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마침 전날 바람~을 찾아온 홀로여행자가 있어 함께 길벗이 되어주었고, 그렇게 폭설이 내린 맑은 아침을 가르고 월정사로 파트라슈를 몰았다.




월정사로 들어가는 길은 초입부터 이미 황홀경.
말을 해 무엇하리.
백번을 말한들 한번을 보는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법.
월정사 문앞에 터잡고 살지 않고서야 이런 황홀한 풍경을 고작 몇십년 사는 생에 몇번이나 볼수 있을까.
함께 길벗이 되어준 남녁땅 낯선 처자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고.

무릎까지 빠지는 전나무숲길은 그 자체로 판.타.지.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나뭇가지에 쌓인 눈들이 우수수..
나의 과대망상인지는 알수없으나, 나니아연대기나 반지의제왕 쯤에서 나오던 백마가 저기 숲길 어디쯤에서 내달려와도 썩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머리속은 이미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고 있었다.





월정사에는 '청류다원'이라는 찻집이 있다.
혼자 올때는 멋쩍어 들어가지 못하다 동행이 있는 참에 들어섰다.
햇살이 따뜻하게 드는 자리에 앉아 차 한잔.
건강을 염려해 주문한 나의 한방차?와, 낯선 처자의 오미자차는 열몇살을 훌쩍 넘는 나이 차이 만큼이나 이미 그것으로도 극명한 대조.




나는 이십대 때 사십살쯤 먹은 노땅들하곤 말을 섞지 않았다.
그들과 나는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
설사 어쩔수 없이 자리를 함께 해야 했을때도 그들의 진부한 얘기를 한귀로 듣고 얼른 다른 한귀로 흘러 보내기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것은 자신감 일수도 있고 철없는 자존심 일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무릎까지 눈이 쌓인 전나무숲길을 되돌아 나오며 함께 걷던 젊은 처자에게 반은 입 밖으로 반은 속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이것은 마치 판타지 같군요, 풍경도 그러하고 젊디젊은 이십대의 그대가 마흔줄을 넘긴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도 그러하고..'

이 자리를 빌어
나를 말벗으로 대해준 젊은 처자에게 그저 감사함을 전한다.


이천십년 일월
폭설이 내린 월정사에서
촌장뱃사공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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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씨
한참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보네요
정말 우와~~~~~~~~이거 밖엔 달리 할말이......
부럽습니다 뱃사공님.....너무 너무.....
언젠간 저도 한번 꼭 한번 느껴보고싶습니다
2010-01-12
18:50:19
利器
으와....
언제나 사진으로나 볼까 기다렸는데 드디어...!

흑...그날 눈길을 헤치고 달려갔다면 만났을 풍경이 이랬군요..
정말 정말....;ㅂ;
흑...정말정말...꿈에라도...;ㅂ;
2010-01-13
01:48:33

[삭제]
삼월이
자신감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젊은 처자가 되었나요? 헤헤.
나보다 많은 세월을 살며 나보다 많은 밥을 먹은 이가 가진,
지혜와 통찰을 나는 좋아해요.

촌장뱃사공님의 지혜와 통찰을 나는 쏙쏙 빼먹고 왔다지요. 헤헤.

길동무가 되어준 것
오래도록 고마워할 일이에요. 고마워요.
그리 많은 눈이 오는데 비척비척 길을 나선 것이
지인들이며 가족에게 미친 짓이란 손가락을 받았는데
기뻐하며 맞아줘서 고마워요.
2010-01-13
18:36:51

[삭제]
만이
대구 사람에겐 진짜 감동적인 세상이었어요..^^ 눈이 오는 걸 보면서 괜시리 눈물도 나고,,ㅎ 갑자기 뱃사공님은 한방차, 사월님은 오미자차를 드셨다는 얘기에... 문득 나이차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남친은 약차, 전 오미자차를 마신 기억이 나네용^^ 호호..
2010-01-14
10:51:01

[삭제]
나뭇잎
아..눈부신 고립~ 이거로군요. 꼭 가고 싶어요. 꼭~ㅜㅜ
2010-12-01
21:26:55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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