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펌, 가난한자들의 첫 기착지, 가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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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5-09-23 11:31
조회수: 4447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6  
"가난한자들의 첫 기착지, 가리봉"  






길을 나서는 날, 비가 온다. 며칠 전 내가 여수에서 춘천으로 짐을 싸들고 이사를 하던 날도 비가 왔었다. 내 남루한 살림들이 비에 젖은 채 이삿짐 탑차 안에 쟁여졌다. 그리하여 춘천에 도착하여 짐을 풀 때는 옷이랑 책들에서 눅눅한 습기 냄새가 났다. 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쌀 때, 왜 느닷없이 그 노래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소, 나도 울었소”라고 하는 비내리는 고모령이. 나는 내 고향 전라도를 떠나 그야말로 타향인 강원도에 몸을 부렸다. 징글징글한(?) 내 고향 전라도를 떠나 올 적에 세상에 비 내리고 내 마음에도 좀 비가 내렸던가, 어쨌던가.

눈물 쏟았던 ‘서울국수’ 한 그릇

아버지는 어느 해, 겨울에 집을 떠났다. 서울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는 현장에 돈을 벌러 간 것이다. 그 추운 겨울, 아버지가 우리들의 손을 놓고 서울 가는 길로 돌아설 적에도 아마 아버지의 눈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물이 흩뿌려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서울 가고 난 다음에 동네 언니, 오빠들이 또 서울로 떠나갔다. 옷보퉁이 하나씩 품에 안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내 고모나 이모뻘 되는 사람들이 그들의 동생이나 조카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공장이나 버스 차장으로 취직을 시켰던 것이다. 그 뒤에 또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한 내 동무들이 서울로, 부산으로, 마산으로들 떠나갔다. 공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야간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서울로 갔던 우리 동네 언니, 오빠들과 내 동무들은 모두 서울의 한 귀퉁이, 관악구 봉천동이나, 난곡 혹은 구로동이나, 가리봉동으로 갔다.

나는 이번 달에 그 구로동과 가리봉동을 간다. 제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발을 디딘 맥락은 서로 다르지만, 오래 익숙했던 전라도를 떠난 내 마음이 예전에 고향 떠난 사람들의 심정을 짚어보고 싶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야 식구들 데리고 세간살이 싸들고 그야말로 이사를 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떠나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딘지 가슴 한구석이 텅 비는 듯이 느껴지는데, 식구들 모두 두고 단신으로 보따리 하나 달랑 싸들고 낯선 곳에 들어선 사람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고향집을 떠난 건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나는 그때 난생 처음 도시를 봤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 것이 여간 쓸쓸한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러 온 나도 그랬는데 내 어린 동무들은 그때 광주보다 더 멀고 더 크고 더 무서운 데라고 하는 서울로 돈을 벌러 갔으니 두말 해 무엇하랴. 그 동무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뾰족구두 신고 양복에 넥타이 매고 명절이라고 고향에 와서 신나게 떠들고(기실은 발악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던 모습이 지금 내 기억에 쓸쓸한 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내가 서울로 처음 왔을 때는 내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나는 서울로 왔다. 나보다 두어 살이 어리지만 일찌감치 서울에 와 어느덧 미싱기술자가 된 친척 동생의 소개로 나는 성수동에 있는 홈웨어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구로동이며 가리봉동이며 난곡이며를 두루 거친 그 동생이 내게 사줬던 국수맛을 지금도 나는 아리게 기억하고 있다. 워낙에 어리숙한데다가 낯선 곳을 무서워했던 나는 동생이 사준 국수 그릇에 눈물을 퐁퐁 쏟았던 것이다. 시골에서는 나보다 더 ‘어리어리’ 했던 동생은 서울살이 몇년만에 ‘따글따글’한 서울내기가 다 되어 있었다. 서울에서의 고달프고 서러운 삶이 동생을 그렇게 단련시켰던 것이다.

내가 맨처음 국수그릇에 눈물을 쏟으며 들어섰던 곳 서울, 그 서울 중에 내 어린 동무들이 맨처음 당도했던 곳, 가리봉동으로 가는 날, 비는 내리고 날은 춥다. 거기에 내 두 아이까지 따라나선다. 큰 녀석한테는 가방을 들리고, 작은 녀석한테는 우산을 들려 들처 업고는 남춘천역으로 뛰었다. 말로만 듣던 경춘선을 처음 타본다.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이 얼핏 내 고향, 곡성의 섬진강을 닮았다. 그러나 섬진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백사장이 없고, 또 더 명확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강 주변에 온갖 이름의 카페와 모텔과 음식점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는 것이다. 우리집 두 녀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하는 셈이라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경춘선 통일호 푸른색 융단의자에 꼼짝도 않고 앉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상경의 길은 시골뜨기들에게 두려움의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가난을 있는 그대로 열어놓고 살았는데

기실 내가 찾아가고 있는 구로동과 가리봉동은 내게 처음 길이 아니다. 십이삼 년 전에 나 또한 구로동 주민이요, 가리봉동 노동자였다. 구로동도 다른 구로동이 아니었다. 지금은 거의 재개발이 되어 그 흔적이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조금만 센바람이 불어도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엉성한 지붕에 얼기설기 합판을 덧대 벽을 만든, 전쟁 직후의 임시막사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선 동네에서 나는 3년을 살았다. 그래도 그 동네에 살면서 우리 두 아이는 좁은 골목을 지치도록 뛰어다니며 놀았고 벽에 낙서하며 컸다. 그리하여 나는 구로동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살았던 집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그곳에 지금은 다 커버린 우리 아이들이 해놓은 낙서의 흔적이라도 있을라나, 하는 기대를 갖고서.



어디나 그렇듯이 세월따라 구로동도 참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 변한 모습이 꼭 세월따라 변한 것만은 아니게 보인다.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변한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임시막사 같은 집들은 포크레인이 밀어내 버리고 거기에 네모 반듯반듯한 벽돌집들을 척척 들어앉아 버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기는 내가 살았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그래도 집집이 부엌문 겸 현관문을 열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성냥갑 같은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들에 사람들은 갇혀버린 듯이 느껴진다. 똑같이 가난했던 사람들이 그 가난을 있는 그대로 열어놓고 살았다면 지금은 그 가난조차도 붉은 벽돌집들에 의해 갇혀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은 이제 그 동네에서 지분지분한 가난이 아니라, 삭막한 가난이 되어버린 듯이 여겨진다. 가난은 콘크리트 벽 속에 매장되고 사람들은 이제 우리 모두 가난한 게 아니고 각자가 가난할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은 구로동의 가난, 각자의 가난 따위는 무시하면서 잘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돈 벌러 온 사람들의 첫 기착지

예전에 내가 살았던 근방에 있는 ‘파랑새 나눔터’는 오늘도 학교에 갔다와서 갈 곳 없는 구로동 아이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온가족이 100평 빌라를 세 채씩이나 갖고 사는가 하면 이곳 파랑새는 스무 평도 안 되는 공간에 40여 명의 아이들이 ‘박시글박시글’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희 집들보다 넓고 저희들 집에는 없는 책과 컴퓨터가 있는 이곳이 더 좋다. 간호사 출신인 공부방 문숙영 선생 또한 고향 화순을 떠나 10여 년 전에 무작정 상경을 한 이력을 지녔다. 마음씨 좋은 공부방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비가 오는 오늘, 김치전을 부쳐 먹고 있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구로동 파랑새 나눔터라는 공간은 각자의 가난을 우리들의 가난으로 나누는 공간이었다. 각자의 외로움을 우리들의 외로움이 되게 하는 곳이었다. 내 가난이 우리들의 가난이 되고 네 외로움이 우리들의 외로움이 되면, 그 가난, 그 외로움도 조금은 견딜 만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임을 파랑새 아이들은 배우고 있는 셈이었다.

구로동과 가리봉동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 내가 아이를 들처 업고 아침마다 구로동 집을 나서서 공장이 있는 가리봉동으로 내달렸던 언덕배기에 오늘은 노동자풍의 사내들이 술에 취해 몰려가고 있다. 중국에서 온 동포와 한족들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공을 친 날, 그들은 낮부터 술을 마셨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져서 구로동의 아랫동네가 되는 가리봉동 거리는 사뭇 이국적이다. 내가 아는 한자가 아닌 낯선 한자 간판들이 즐비하다. 말하자면 이곳 가리봉동은 지금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의 동네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와 내 고향 언니, 오빠들과 내 동무들이 돈을 벌러 서울에 왔던 구로동과 가리봉 언저리의 공장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상경의 역사를 지닌 뭇사람들과 10여 년 전에 내가 다녔던 그 공장들은 어디론가 옮겨갔거나 없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사람들은, 공장도 없어지고 있는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그리하여 가리봉 오거리 옆 가리봉시장을 차이나타운으로 만들어낸 것일까. 이 구로동과 가리봉동이 왜 공장이 많았던 시절이나 공장이 없는 지금이나 돈 벌러 서울에 온 사람들에게 첫 기착지가 되고 있는 것일까. 구로동과 가리봉동엔 낯설고 물선 서울땅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꼬여들 수밖에 없는 무엇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왜 부자들은 압구정동으로 모여들고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가리봉동으로 모여들까. 왜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하고, 왜 또 소설가 양귀자씨는 바람 부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고 할까. 춥고 비 오고 바람 부는 오늘 나는, 압구정동으로 안 가고 가리봉동으로 왔다.

떠나온 자 밝히는 가리봉 불빛

가리봉 오거리 ‘동포의 집’에 비 와서 공친 동포와 동포는 아니지만 동포의 집에 놀러온 중국인들이 모여 앉아 있다. 그들 중에 비 오는 날, 어김없이 술에 취한 동포 우씨는 내게 나들나들한 종이 하나를 내민다. 일종의 영수증이다.

일금: 100만 원
이름: 우○○
위 금액을 1997. 8. 20부터 1998. 3. 30까지 결재함.
1997. 8. 20.
인천시 가정동 30번지 강○○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대장간을 하는 우씨가 ‘뿌로까’ 일을 하는 한국 인천시 가정동의 강씨한테 우리 돈으로 치자면 1백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한국으로 올려고 했는데 돈을 받고 영수증을 써준 인천 강씨는 우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우씨는 결국 돈만 떼이고 다른 ‘뿌로까’를 통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씨는 한국으로 왔으니 어떡하든 제 돈 떼어먹은 인천 강씨를 찾아내서 응징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꽉 차 있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 온 지 7개월밖에 안 됐는데 한국정부는 불법체류자인 자신더러 자진신고를 하여 1년 안에 한국을 떠나라고 하니 떼인 돈도 돈이고 돌아가면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할지 속이 상해 오늘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씨에 비하면 올해 57세인 최씨는 나은 편이다. 그는 한국 온 지 7년째고 가리봉에 산 지는 6년째다. 한국에서의 7년 동안 2백만 원 체불임금 떼인 것 말고는 큰 사건 사고 없이 한국 올 때 진 빚도 갚고 돈도 좀 모았다. 이제 최씨는 내년 3월이면 길림 고향으로 돌아갈 참이긴 한데, 아직은 일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건강한 몸인데도 고향에 간들 할 일이 없어 오히려 그게 걱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년 3월에 고향으로 안 가고 다시 한국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다. 어쨌든 최씨는 우씨보다는 여유가 있어서인지 당장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도 보편적이고 ‘력사적인’ 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자신은 외국에서 살았지만 한국사람으로 자부심이 있고 그래서 한국에 오면 더욱더 우리말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런데 왜 공사판에서 전부 일본말을 쓰냐, 언어가 있는 민족으로서 자존심도 없느냐,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힘내자고 하지 않고 화이팅이라고 하더라, 말은 얼인데 이렇게 자기 말 천대하면 생김새만 한국사람이지 다 외국계 민족이 될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최씨가 맨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의 ‘배운 자’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최씨가 기거하는 가리봉동 지하단칸방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따뜻했다. 이 방은 맨처음 서울로 돈 벌러온 우리의 ‘상경자’들의 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90년대 초 여름에는 가출 청소년들의 방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 방은 역시 돈을 벌러 밀입국을 한 동포 최씨의 방이 되었다. 방 주인들은 각각 다르지만 공통된 한 가지는 그들이 다들 ‘못 먹고 못 입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파랑새에 임시로 맡겨놓은 내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다시 춘천으로 가는 경춘선 밤기차를 타야 한다. 나, 오늘 힘들지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위안인가.





가리봉동의 밤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낯선 한자 간판들에 불이 밝혀진다. 저 불 밝힌 거리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불 밝힌 가리봉동 거리에서 내 동무들도 저들처럼 저 거리에서 저렇게 외로웠을까. 10여 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가난하고 외로운 저들이 가고 나면 가리봉동은 또 어떤 사람들을 맞아줄까. 그때도 여전히 압구정동 가는 사람 따로 있고 가리봉동 가는 사람 따로 있을까. 가리봉이 압구정 되고 압구정이 가리봉 되는 세상은 정녕 올 수 없는 것일까.  

글, 공선옥
사진, 박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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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구
사공님 여기 저희 동네에요...
2005-10-30
20:00:20

아, 그렇군요..
저도 이 근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죠..
공선옥님의 이 글이 그래서 더 가슴에 와 닿는거 같습니다..
2005-11-02
13:12:22
이상한언니
성수동은 제가 어려서부터 20살까지 살아온 곳..
가리봉은 지금 제가 다니는 직장..^^
2005-11-29
12:00:48

아, 그렇군요.. 이상한언니도 우리 '없이사는 클럽'에 가입하셔야겠네요..^^
2005-11-29
12:58:07
농촌지도자
그래도 이제는 역명이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었는데~ '없이사는 클럽'도 이제 "선 없이 사는 무선디지털클럽" 어떤가요~ ^^
2006-07-17
18:36:40

오,, 매우 허를 찌르는 유머입니다..^^
2006-07-21
20: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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