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화보다불쑥) 불가해한 '봄날'의 추억 - 삼척 맹방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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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2-27 02:43
조회수: 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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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영화'라는 쟝르에 일자무식인 자가 영화를 보다 불쑥 영화속으로 떠난 짧은 여행기이다.


- 불가해한 '봄날'의 추억


아내와 말다툼이 길어졌다.
밤 열두시무렵부터 시작된 전화통화는 아침 일곱시가 될때까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지루하게 계속됐다.

나는 무엇이든 이야기는 매듭을 지어야한다고 믿고 있었고, 아내는 가급적 침묵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결혼을 매개로 맺어진 부부의 일은 생각처럼 전후가 선명하지도 않고 침묵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루한 얘기가 길어지면서 목소리톤은 오르내리기를 반복했고 감정은 격앙되거나 혹은 맥이 풀려 가라앉아버렸다.

아내는 건조하게 말했다.

'차라리 친구일때가 좋았어...'

빈속에 소주를 부은 것처럼 가슴이 쓰리고 명치끝이 답답해졌다.


그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지금 보다 훨씬 아름답고 따뜻했던 시절이 있었지.
우리들의 푸르른 '봄날'.



나와 아내는 꽤 오랫동안 연애를 했다.
대학 일학년 가을부터 시작된 연애는 군대시절을 거쳐 서른이 될때까지 십년동안 계속됐다.
입대를 앞두고 떠난 짧은 여행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내 팔짱을 꼈을때 난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어찌할바를 몰랐고,
휴가를 나와 꿈같던 첫키스를 했을때는 몸의 오감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아득하고 행복했다.

지독하게 견디기 싫어 탈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때 그녀의 존재는 나를 지켜주었다.
기다리던 편지가 오면 읽기가 아까워 뜯어보지도 않은채 앞가슴 주머니에 넣어두었고, 그런 날은 고참들에게 얻어맞고 얼차려를 당해도 아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군대시절 내내 나의 중요한 일과는 밤마다 관물대 밑 조그만 백열등 아래에서 연습장을 뜯어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숨쉴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어떤 고참은 너에겐 이게 제일 필요할거 같다며 수백장짜리 전지우표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제대를 하고 연애 오년차를 넘어서며 소위 '오래된 연인들'이 되었지만, 몇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삶은 아직 봄의 언저리에 걸쳐져 있었다.

어떤 날은 몇 분 만이라도 함께 더 있고 싶어 시간을 끌다 지하철 막차를 놓쳐 지하도 계단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고
단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의 끝에서 끝까지 새벽길을 내달려가기도 했다.
얼굴을 볼수 없는 날은 아주 익숙하게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밤새 잠을 자기도 했고,
들국화 한다발을 사서 그녀가 오기까지 집앞에서 기다리는 날엔 꽃향기를 맡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누구보다 열정적인 연애를 하고
누구도 부럽지 않게 화창한 봄날을 만끽했던 우리가
결혼 십일년차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서로를 지치고 힘들게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랜 연애를 겪으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우리의 봄날이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당황스럽고 힘들다.

아니 조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부적응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봄날이 지나갔다는 현실이 아니라
그때 그 봄날은 왜 그저 한없이 아름답기만 했는지 하는 것이다.

종종은,
지난 시절 나의 그런 열정적인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됐던 것인지 궁금해질때가 있다.
고참에게 맞아도 아프지 않고, 겨울날 지하도에서 자도 춥지않고, 온종일 걸어도 힘들지 않은, 그 정체모를 에너지는 어디에서 생겨났던 것일까.
이젠 사소한 것으로도 쉽게 지쳐버리는 '나'와 그 정체모를 에너지에 휩싸인 '나'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머리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졌다.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봄날은 간다'..
사랑은 이렇게 변한다고, 그대의 봄날도 이렇게 지나갈 것이라고 또박또박 말해주던 영화.
상우와 은수가 함께 누리던, 햇살같던 봄날과, 바닷가와, 대나무숲과, 갈대밭은, 늦은 밤까지 시골사진관 배경지 위로 리플레이 되었고
영화를 보던 나는 불쑥, 상우가 파도소리를 채집하던 맹방해변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대관령 고개마루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찾아간 바다는 봄날처럼 설레이고 또 편안했다.
평창 산골과 다르게 바람은 부드러웠고 햇볕은 따뜻했다.

지는 오후 해를 등으로 받으며 나는 한동안 모래사장 위에 앉아 나의 꿈같던 지난 '봄날'을 떠올렸다.
사랑은 본래 그래, 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견디기 어렵고, 힘들고, 귀찮은, 것들도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하여 급기야 주변의 모든 날선 것들에 무뎌지게 만들었던 불가해한 열정의 추억.
오후 내내 나는 이 지나가버린 것들과 현실의 간극을, 건너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봄날의 바다를 맥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차라리 친구일때가 좋았다는 아내의 말이 결국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 그 시간이 우리들 삶의 '봄날'이었으므로.



# 1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상우를 강릉까지 태워다 준 택시기사 친구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말에 두말없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먼길을 달려주는 친구..
나는 그런 친구가 그립다.

# 2
이번 여행도 마침 바람~에 머물렀던 홀로여행자가 있어 함께 동행해주었다.
그는 이십대의 젊음이었고 나는 남루한 사십대였지만,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어도 혹은 마땅히 나눌 이야기가 없어도, 일부러 건내야 할 말을 찾지 않을수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아직 오지 않은 봄날의 바다를 맥없이 쳐다보고 있는 동안 젊은 벗은 내내 조개껍질을 줍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풍경.
여자친구에게 선물해줄 조개를 줍기 위해 봄날의 바닷가에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던 이십년 전 내 푸른 젊은 날의 데자뷰.
이 자리를 빌어 뱃사공의 '영화보다불쑥' 여행에 동행해 준 눈맑은 젊음에게 감사를 전한다.

# 3
지난 월정사 폭설판타지에 동행해 주었던 젊은 벗이 책을 보내주었다. 임에스더의 '연인'
대충 훑어본 바, 사계절을 오직 봄날로만 인식하고 있는 연인들의 위험천만한 이야기.
내가 근래에 본 책 중 가장 불온하고 위험한 서적.
국방부는 엉뚱한 양서들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할것이 아니라 이책의 영내반입을 막아야하리라.


이천십년
아직 오지 않은 봄날
촌장 뱃사공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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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
아주 부러워요. 부럽고 또 부러워요.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봤어요. 그 후에도 종종 생각이 나서 일 년에 한 번씩은 비디오로 빌려봤지요.
고등학생 때는 상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은수가 이해가 되지 않더니 해가 가면 갈수록
놀랍도록 은수를 이해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은수의 사랑은 변했고, 제 생각도 변했고.

영화를 몇 번 보고 나니 이제 내용보다는 배경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삼척 신흥사도 가고 싶다, 맹방해수욕장도 가고 싶다, 정선 아우라지도 가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뱃사공님은 다녀오셨구나. 부러워요.
삼척 신흥사에 몇 번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스님께 하루 묵을 수 있는 허락까지 받았었는데
기회가 자꾸 어그러져 아직까지 연이 닿지 않았어요. 올해는 갈 수 있으려나?

아아.
사진 보고, 글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버둥버둥 어디 좀 가자고 떼를 쓰지만 忍 忍 忍을 머리로 쓰고 있습니다.



*
불온하고 위험한 것!
그대에게도 사계절이 봄이었던 때가 있었잖아요.
역시 뱃사공은 달콤함 허무주의자!!!
2010-02-27
10:52:58

[삭제]

아내가 그러네요.
'왜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써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자초하느냐,
이십대가 보면 그럴싸하겠지만.'

해서 제가 그랬지요.
내가 무슨 없는 얘길 썼나? 결혼 십년차쯤엔 자연스러운 것이지.

삼월양 얘길 들으면 아내가 속으로 그럴겁니다.
'달콤은 무슨! 뱃사공, 이 자가 허무주의자인지는 몰라도 달콤이랑은 거리가 한참 멀다. 온갖 미사여구로 세상을 기만할뿐!'
2010-02-28
01:16:30
무릎위에 원샷
결혼 일년차가 봐도 자연스러운 이야기인데요?
근데... 불온서적 이야기는 왠지 이십대의 열정적 사랑을 질투하시는 듯한 느낌이네요 ㅋㅋㅋ
꿈 꿀 수 있을 때 많이 꿈꿔라~~~~~~~~~~~
2010-03-02
16:09:11

[삭제]
눈맑은젊은이
저또한 감사를.
뱃사공님이 오지않은 봄바다를 바라보고있을때.
저는.
가지않은 겨울 바다를 마치 정말로와버린 봄바다인것처럼 보고 또 보았어요.
끝끝내 봄바다였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현실도피인가요?ㅎ)
아직도 겨울이에요.

입춘도 지났고 대보름도 지났는데.
사람들은 다들 봄이라는데.
겨울이예요.

봄날이 오지도 않았는데.
봄날이라 착각을 하고 그 착각에 실망을하고
봄날은 원래 없던거야라고 생각하는것 또한 문제가 있겠지요...ㅎ
그럼...봄날은 좀 기다려 볼까요...!ㅎ
2010-03-03
16:32:44

[삭제]
눈맑은젊은이
그런데.. 마지막 사진속 자그마한 저 사람은 저인가요? 혹시???
(아..나였음 좋겠다아~ㅎㅎ 나라고 해도 모르겠다~ㅎㅎㅎㅎㅎ)
하늘은 보고있는건가??뒤돌아 땅을 보고있는건가???흠.....-ㅅ-;;;;
2010-03-03
16:34:08

[삭제]

무릎위의원샷/
결혼 일년차에 이런 허무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문제인데요..^^
연애하실때도 그랬던 것처럼 결혼 후에도 종종 새로운 기운을 충전해 주는 바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v2.0이 다시 또 유랑의 닻을 올리기 전에 꼭 한번 들르세요.
많이 반가울 겁니다.

눈맑은젊은이/
마지막 사진속 주인공은 그때 함께 해변에 있던 다른 어떤 사람이지요.
허나 아무려면 어떻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엔 모두, 아직 오지 않은 봄날의 바다를 만끽하고 있었으니.
졸업,, 세상속에 풍덩 뛰어들어 잘 살고 계신가요?
봄날같은 젊음에 응원을 보냅니다.
2010-03-06
01:35:12
마린빛바람
재작년 겨울에 저곳에 간것이 생각나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맹방해수욕장옆이 맹방인줄알고 일출을 봤다면서
캭캭 거리다가 나왔는데 나오는 택시에서 기사님이 그 옆이 맹방이라고
말하던,, 허무한 스토리..
그러면 어떻겠어요. 그 순간이 좋았음 됐죠
2010-07-06
13:37:14


맹방해변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군요.
한여름도 아닌때 그 외진 곳엘 어인 일로..

다들 무슨 치유해야할 것들이 있는 것인가??...
2010-07-06
19: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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