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펌) 새끼 여섯 가슴에 넣고 하루도 핀한 날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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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7-03-30 22:11
조회수: 4086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 ‘배 보는 사람’ 최옥란 할머니

강원도 문산리서 ‘줄배’ 끌던 71살 최옥란씨
정선서 가마타고 온 시집 두번 못할 일이래요
김장사·생선장사 닥치는대로 댕기미 팔았지
새끼들 죽은 달만 되믄 아주 그렇게 아파요




지난해 여름, 강원도가 잠길 만큼 비가 퍼붓던 날부터 남한강을 따라 걸었다. 욕심내지 않고 형편 닿는 대로 걸었을 뿐인데 발원지에서 시작한 걸음이 어느덧 양수리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궂은 날씨였지만 양평 일대에 단 한척 남았을 여객선인 수청호를 타고 강 위를 노닐었다. 10년 동안 수청호를 몰았다는 정광수씨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다시 나루터로 돌아 와 느티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10여 년 전, 일흔 하나였던 최옥란, 그니도 뱃사공이었다. 수청호는 동력선이어서 스위치만 넣으면 경쾌하게 움직였지만 그니가 몰던 문산호는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가는 배였다.



» 최옥란은 문외마을과 금이마을을 이어주는 나룻배의 사공이었다. 사진의 집은 못 쓰는 배를 바닥으로 삼아 하우스를 올려 지은 배보는 집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문산리의 문외마을과 금이 마을을 오가던 그 배는 긴 삿대가 있기는 하지만 뭍에 닿아 있던 배를 강으로 띄울 때만 잠시 사용할 뿐, 강 이쪽저쪽을 줄로 매어 놓고 줄을 잡고 건너다니는 줄배였다. 줄을 당겨 사람이 탄 철선을 움직여 강을 건네주는 일이 수월한 일이 아님에도 칠십이 넘은 여자 몸으로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니를 두고 그곳 사람들은 사공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배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 눈같이 흰 할머니가 목장갑을 끼고 줄을 당기고 있었으니 어찌 나의 눈에 들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강으로 가는 길에 ‘배보는 사람’인 그니의 도움 없이는 건널 수가 없었으니 무던히도 만났었다. 새벽에 강을 건널 때와 늦은 오후 다시 강을 건널 때 마다 그니와 마주치곤 했으니 낯이 익은 어느 날은 그니가 집에 들어 와서 부침개를 먹고 가라며 권하기도 했다. 엉덩이를 걸쳤으니 나 또한 가만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니가 메밀 부침개를 내면 나는 과자나 소주와 같은 것들을 갖다 놓고 팔기도 하던 그니 집에서 소주를 두어 병사서 권 커니 받거니 홀짝홀짝 마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저녁조차 라면을 끓이고 그니가 먹다 남긴 식은 밥을 말아서 훌훌 해치웠으며, 술이 덜 깬 몸으로 음주 운전 하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그때 강을 비추던 달빛과 함께 총총 박혀 있던 별들의 아름다움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기어코 안 받겠다던 배 삯 천원을 한사코 배에다 던지다시피 놓고 줄행랑을 치며 “할매요, 담에 또 올께요.”라고 했던 것은 그니가 소주를 팔아 줬으니 배는 공짜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돌아가는 그니의 배를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절운재를 넘어 거운리로 나오는 산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마주치는 자동차가 있으면 굳이 피했던 것은 불빛에 눈이 부셔서가 아니었다. 행여 아무도 걷지 않는 깜깜한 산길에 중년의 사내가 청승스럽게 눈물을 흘리며 걷는 모습을 들킬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된 것은 그니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였다. 정선군 신동면 운치리 납운들 마을이 고향이라던 그니는 열일곱에 문산리로 시집을 왔다고 했다.




중신애비가 중신을 서고 얼굴도 보지 못한 신랑으로부터 사흘 만에 사주단자가 왔으니 문산리로 출발했는데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이었다. 강이 흐르니 혹시 배를 타고 시집을 온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래도 번듯하게 가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배를 타기도 했지만 가마를 탄 채 배를 탔을 뿐, 내려서 걷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이 여간 만만치 않은 길이다. 동강을 걸어서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납운들 마을에서 고성산성 아래 소동마을로, 그리고 물레재를 넘고 배로 소사에서 연포로 건너 다시 가정마을을 지나 지금은 흔적조차 가뭇없는 떼재를 넘어야 했으니 오죽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그때 거기서 가마타고 이까지 오려면 할매는 타고 앉았으이 괜찮아도 가마 메는 사람이 힘들었겠네요.” “하이구, 내가 그때 열일곱인데, 가매를 탔다 해도 사람이 며칠 동안은 뚜디리 맞은 거보다 더 다리를 절구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말이래요.” “아니 가마를 타고 왔는데도 그랬다 말이에요.” “말도 모하지, 내리 가는 데는 아무리 저게, 저게 해도 까꿀로 코방 찧을라 하고 올라가는 데는 암만 붙들어도 뒤로 자빠져서 헛짓 이래요. 올라 갈 때나 내리 갈 때나 말카 하도 팔을 뻗대가지고 사흘 동안 뚜디리 맞은 거보다 더해요. 그날이 구월 시무 아흐레 날이래요, 그러이 해는 또 오죽 짧소. 새벽밥 묵고 떠났는데 저녁밥 끼니때가 되니 시집에 다 왔다고 하는데 내리 설라하니 다리가 아파개주고 설 수가 있기나 했나, 다리고 팔이고 허리고 간에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으이 가매 타고 뭐고 간에 하이구, 그런 시집 두 번 다시 못 갈 시집이래요. 죽을 뻔 했지. 그런덴 첨 봤어.”


그 다음, 어느 봄날.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지친 몸을 할머니 가게에서 부침개와 소주로 풀면서 물었다. “시집와서는 어땠어요.” 참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그니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상, 고상 하두 많아 말로 다 못해요. 운치리나 여게나 다 쌀농사가 없어요. 그러이 이밥을 먹어 보기나 했나요. 집에 살적에도 못 먹어보고 시집 와서도 못 먹어보고, 맨날 먹어봐야 강냉이나 보리, 기장쌀, 메물, 콩이나 팥 그런 거래요. 그래 살다가 그것도 못 먹게 생겨서 내가 장사를 댕깃지요. 그릇장사, 김장사. 생선장사 뭐 닥치는 대로 다 했지요. 여게서 나는 거 이고 나가서 팔고, 또 그 돈으로 거게서 나는 거 사 가주고 이 마을 저 마을 댕기미 파는 거래요. 영월장에 나가서 팔고 정선장이나 강릉장 이런 장으로 가서 또 소금이나 생선 이런 거를 사다가 파는 기래요. 평창에 대화장까지도 댕기고 그랬으니, 그때 뭐 자동차가 지금 맨치로 있나, 또 있어도 그놈의 돈이 비싸니 탈 수가 있나, 상구 걸어 댕깃지요. 하도 그놈의 것들을 머리에 이고 댕겨서 이놈의 모가지고 다리고 간에 아파 인자는 아무것도 머리에 이지를 모하고 걷지도 모하는 기래.”

그때 길이 어디 지금 같았겠는가. 신작로 말고는 사람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서야 하는 넓이였으며 그나마 리어카라도 구를 수 있는 마을 안길과는 달리 마을과 마을을 오가는 길은 강 옆으로 치솟은 뼝대에 난 베루길, 곧 벼랑길이었다고 하니 그 모습을 상상하는 내 생각조차도 그 길을 걷듯이 아득하기만 했다. 마음 한 번 추슬러 또 물었다.

“뭐, 그래 지독하게 살았대요. 여서 강릉이 어덴데 그 먼데를 걸어갔다 온다 말이래요.” “여서 강릉 갈라믄 이 산으로 넘어서 진탄 마하리라는 데로 간다 말이래. 진탄에서 미탄으로 나가서 큰 재를 하나 넘으면 정선 땅이고 정선장을 보고 여량장으로 해서 임계장까지 보고나믄 인제 삽당령이라는 큰 재만 하나 남으면 강릉 땅 성산이래. 그래 댕기는 거래. 장에서 사고 팔고 물건을 해서 이 골짝에 오믄 또 집집마다 댕기미 팔아서 애들 공부 시키고 하는데 다 쓴 거지 뭐 있나.”


그렇게 정신없이 사는 동안 여덟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여섯은 그이 가슴속에 꼭꼭 묻었다고 한다. “그때, 이런 산골에 무슨 약이 있는가. 애기들 아프다고 하민, 뽕나무나 그런데 있는 벌거지를 캐다가 참기름에 볶아서 믹이고 그랬는데. 에미가 무식하니 이런 거 저런 거 모르고 독한 약 잘못 믹이믄 죽고, 그거 겁나서 약도 못 믹이서 또 죽고. 딸 너이 아들 너이 이래 낳는데 지지바고 머스마고 그래저래 보내고 인자 아들 둘만 남았어. 그거라도 남았으니 다행이지. 우린 새끼 복이 없어 그래 된 거 그걸 우예요. 할 수 없지. 그것들 여섯은 전부 내 가슴속에 넣어 놓았는데 그것들 때문인지 요새 그래 가슴이 아파요. 기침도 자주 나오고, 못난 에미 잘못 만난 죄지. 그것들이 뭔 잘못 있어서 세상에 나와 눈도 못 떠보고 죽고, 걸어 보지도 못하고 죽고, 그것들 생각하면 잠이 안 오지. 그래 오래돼도 내 그것들 낳은 날짜 까정 안 잊어버리고 산다니까. 이월 초하루에 하나, 삼월 달에 하나, 팔월 달 둘, 정월달에도 둘 낳고, 오월 달에 또 둘 낳고 그랬는데, 그것들을 전부 이놈의 가슴에 묻고 사니 하루도 핀할 날이 없어. 그것들 죽은 달만 되믄 몸이 괴롭고 아주 그렇게 아파요. 인자 그 달이 지나가먼 좀 덜 아프고….”

그러니 어찌 나의 마음인들 편했겠는가. 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덩달아 심란해지고 괜한 이야기를 물었나 보다 싶어 황급히 짐을 챙겨 떠나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눈물지으며 걷던 길을 되짚어 지난해 가을, 문산리에 갔다. 그러나 그니는 없었다. 배조차 강기슭에 묶여 있을 뿐 움직이지 않은 지 오래 돼 보였다. 대신 견고하고 튼튼하며 한껏 멋을 부린 콘크리트 다리가 번듯했다. 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러나 기를 쓰고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나의 그리움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서로를 지독하게 묶어준다는 네트워크의 편리성이 앗아간 것들은 무엇일까. ‘실시간 네트워크’라는 기술을 얻기 위해 우리들이 담보로 내준 것은 오히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지는 않을까. 그 때문인가. 나는 여전히 사람이 그립다. 그로부터 외롭지만 또 항상 그가 그립다.

»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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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어머~~~~~~저기 사진이 우리 큰이모네요 지금은 이모가 몸이 안좋아서 요양원에 계신다고하네요
2010-10-15
18: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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