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춘천의 두 옛길, '의암호길'과 '석파령'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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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6-03-3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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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만 돌아가야 하는 걸까..

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서러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공지천에서 의암호를 건너 경춘국도에 이르는, 푸른 호수가 있는 찻길. 의암터널이 뚫리고, 그 길이 서울로 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새 길에 내어준 지 이제 꼭 10년입니다. 벌써 ‘옛길’로 불리는 것은, 너무 일찍 현업에서 물러나거나 너무 이른 나이에 할머니가 되는 것처럼 서글픈 일일 터입니다.

사실, 그 길이 어디 그냥 길이던가요. 5월의 사랑이 숨쉬고 11월의 이별이 잠자는, 부푼 희망을 품은 사람과 아픈 절망을 안은 사람이 같은 꿈을 꾸는 길. 어떤 이에게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으로, 어떤 이에게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다가오는 ‘영원한 청춘의 길’. 옛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이름에 갇힌다 해도 ‘우리가 당신을 잊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 길의 서글픔에 한 자락 위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공지천은 여전합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염없는 기다림에 취해있는 ‘강태공’들이며, 바쁠 것도 급할 것도 없이 발 구르는 꼭 그만큼만 앞으로 나아가는 오리보트며, 연둣빛 고운 양산 아래 수줍은 미소 감추고 천천히 저어가는 연인들의 배. 그 풍경들은 아주 힘이 세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들에 기어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듭니다. 하필이면 왜 ‘기다리는 일’을 여가로 삼는지, 유람선을 놔두고 수고롭게 발을 구르거나 노를 젓는 배를 타는 일은 왜 하는지, 이해하는 정도를 넘어 마침내 ‘나도 저 풍경의 하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맙니다.



갈 길이 멉니다. 좀더 있고 싶은 마음을 추슬러, 춘천을 ‘호반의 도시’로 불리게 만든 ‘의암호’쪽으로 차를 몹니다. 한쪽으론 옥수수며 고추며 가지를 심은 밭들이 펼쳐져있고 반대쪽에선 이름모를 들꽃들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차량을 향해 환영의 손을 흔드는, ‘문명의 풍경’이라기보다 ‘자연의 풍경’에 가까워 보이는 찻길. 그 길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한 곡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의암호의 은빛물결이 보입니다. 의암호의 상징처럼 돼버린 ‘김유정 문인비’를 시작으로, 풀죽어 있던 바람은 문득 서늘해지고 성질 사납던 초여름 뙤약볕은 불현듯 순해집니다. 어느새 차의 속도도 줄어 천천히 길을 휘돌고 나면, 아치형 장식도 요란한 색칠도 거부한 채 오랜 세월 같은 모습으로 ‘늙어가는’ 신연교(의암호 다리)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경치가 너무 좋아서 이곳을 택했어요. 집은 가평인데 여기저기 마땅한 장소를 알아보러 다니다가 여기다 싶었지. 이제 넉 달째인데, 물결이랑 바람에 취하다 보면 이따금 신선이 된 것 같아요.”
트럭을 세워두고 이 길에서 토스트를 파는 백승석(68세), 이춘자(55세) 부부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이 길은 연인들의 길. 온종일 붙어 있으면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 일도 잦지만, 황혼에 접어든 부부의 사랑은 이 길에 서 더욱 두터워져 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삼악산 최고의 자랑인 등선폭포 입구에 이르러, ‘청춘국도’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경춘국도’가 시작됩니다. 호수를 끼고 옛길을 휘돌아온 차들과 쭉 뻗은 새 길로 달려온 차들이 한데 섞여 흘러드는 경춘국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것들을 함께 품어 안는 일의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이제, 또 하나의 옛길인 ‘석파령’으로 갑니다. 의암호로 길을 되짚어 삼악산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달리면, 석파령 입구마을인 덕두원리. 고목 위에 앉은 백로가 ‘솟대 위의 새’처럼 신성한 자태를 뽐내고,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가 헹궈낸 빨래보다 하얀 웃음을 웃는 ‘원형의 마을’입니다.
“의암댐이 생기면서 호수가 됐지만 옛날에는 거기가 ‘신연강’이라는 강이었어. 30년대 후반 신연교가 생기기 전까지, 서울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석파령을 넘어야 했지. 이름이 왜 ‘석파령’인 줄은 알고 온 거야?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에서 신구관 부사들이 교체를 했는데, 길이 좁아서 갖고 온 돗자리 둘을 깔지 못 하고 하나를 둘로 잘라서 앉았다고 해. 자리를 찢었다는 뜻으로 ‘석파(席破)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마을 초입에서 만난 최관화 할아버지(69세)의 설명입니다. 석파령이라 불리게 된 사연은 알고 있었지만 ‘쇠파람재’라고도 불리는 내막은 모르는 터여서, 할아버지께 여쭙습니다. 한문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석파령’이 ‘쇠파령’으로 ‘쇠파령’이 다시 ‘쇠파람’으로 바뀐 거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발음의 오류에서 비롯된 일이라지만, 쇠파람에 이르러 고개는 비로소 ‘원님’들의 것이 아닌 ‘민초’들의 것으로 제 자리를 찾은 느낌입니다.
“우리 할멈이 고개 너머 당림리 처녀였어. 열다섯에 석파령 넘어 나한테 시집을 왔지. 혼례 치르던 날 얼굴을 처음 봤는데, 그 곱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해.”
잠시 들일을 멈추고 가게에서 한 잔 술을 걸치던 최기선 할아버지(66세)의 ‘석파령 추억’입니다. 평생의 반려가 되기 위해 흔들리는 가마를 타고 험한 고갯길을 넘어온 ‘어린 신부’. 술 때문인지, 추억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불콰합니다.


  고운 추억을 뒤로 한 채, 마을 안쪽으로 한참을 더 들어갑니다. 쉬이 만나지지 않는 석파령 입구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던 차에, 흑염소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 백운봉 할아버지(79세)를 만납니다. 석파령 아래 작은 집에서 한평생 염소를 먹이고 밭을 갈아온 할아버지의 작은 등은 일하는 자세 그대로 굽어있습니다. 어쩌다 짬이 날 때 고개 위 서낭당으로 이따금 놀러갔을 뿐, 석파령을 넘어 서울로 갈 일은 좀처럼 없었다는 할아버지. 한 평생 같은 자리에서 땅을 일궈온 할아버지에게 석파령은 ‘대처로 나가는 경로’로서의 길은 아니었던 겁니다. 가까이에 길이 나있어도 그 길 너머의 세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곁에 아직 ‘고향’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침내 석파령 입구에 다다릅니다. 눈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 오른쪽 길은 ‘진짜 옛길’이지만 산림보호 명목으로 폐쇄돼 있고, 왼쪽 길은 10여 년 전 임도로 닦아놓은 ‘가짜 옛길’이지만 들어갈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들어갈 수 있는 길’로 들어섭니다. 얼마를 올랐을까요, 키가 1m를 훨씬 넘는 개망초꽃이 하얀 소금밭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는 풍경을 만납니다. 뽑고 또 뽑아도 다시 자라나는 생명력 때문에 ‘망할 놈의 풀’이라 부르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는 ‘개망초’. 사람들의 등살에서 놓여난 이 곳에서야 ‘망할 놈의 풀’은 비로소 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개망초 군락을 거치고 한 자리에서 오랜 세월 석파령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지켜봤을 밤나무를 지나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까 본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규모의 개망초 군락에 파묻혀 길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한두 개의 씨앗으로 시작됐을 엄청난 야생의 힘 앞에서 할 수 있는 추측이란 그저, 길로서의 소용이 사라지고 난 뒤 길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을 거라는 것뿐입니다. 의암호길이 ‘추억의 품’으로 돌아갔듯,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석파령.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 그 길에서 생각합니다. 곧 돌아가겠노라 다짐해놓고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것은 아닌지, 질주의 관성에서 벗어나 이제 그만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곳이 어디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도, 웬일인지 가슴이 뜁니다..


    글 박미경 사진 남윤중



* 뱃사공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1-09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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