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숲길처럼 세월이 흘러도 - 주문진에서 월정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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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7-27 00:01
조회수: 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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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아이가 학교수련회를 설악산 근처로 온다길래 이참에 모처럼 부녀간에 데이트나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우선은 맛난거 사줘야하니 가던 길에 봉평농협에 들러 늘 마이너스로 찍혀있는 통장에서 돈을 조금 찾았습니다.

현금인출기 화면에 찍히는 잔액 숫자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오지만 그래도 데이트 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철없이 즐겁더군요
예전 연애하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처음 둘이서 만났던 날, 어머니가 주신 책값을 몽땅 털어 이런저런 데이트자금으로 쓰면서도 뒷일 걱정이 안되던 그 젊은 대학 시절이 문득..

딸아이가 있는 속초까지는 넉넉히 두시간이면 닿는 길이지만 그냥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연애시절에 지하철 배차시간이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던 때처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딸아이를 반갑게 만나서 이런저런 수련회 무용담 얘기를 하며 바다로 향했지요.

'아빠가 바다 보여 줄까? 아빠가 우리 딸 맛난거 사줄려구 돈 마~니 가져왔다^^'

딸녀석이 씨익 눈웃음을 지었습니다.





▲ 소돌항 간이어판장 물고기들이 파라솔빛이 되었다



우선 뱃사공이 무척 집착하는 바다동물들을 단체관람하기 위해 주문진항에 들렀습니다.
오후가 된 시각이라 장은 이미 많이 파하고 좌판아주머니들도 몇분 안계셨지만 바닥에 질퍽거리는 바닷물만으로도 기분은 충분이 상쾌해졌고, 마침 문어가 제철이었는지 조금 가격이 내렸길래 식구들 주려구 큰맘 먹고 한마리 사고, 주문진에 와서 오징어를 지나칠수 없어 또 한꾸러미 사고, 뱃사공이 회를 먹으러 자주 들르는 소돌항으로 향했습니다.

소돌항은 주문진에서 불과 차로 사오분 거리이지만 한적하기도 하고 또 마을 어촌계에서 직접 잡은 그날그날의 잡어들을 선주 아내되시는 분들이 직접 회를 떠주는 곳이라 저렴한 가격에 싱싱한 자연산 바다동물을 먹을 수 있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이만원에 잡어를 한접시 떠서 어구가 모여져 있는 선창 그늘가로 가 주변에 있던 고무대야를 식탁 삼아 딸아이와 둘러앉아 오후의 성찬을 즐겼지요.
곁에서 그물을 정리하던 마을 어르신들이 '저 부녀가 무슨 사연인고'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셨지만 뱃사공은 딸아이와 바다냄새 맡으며 회 먹는 재미에 마냥 즐거웠습니다.
소주 없이 무슨 맛으로 회를 먹을까 싶었는데 그저 달기만 하더군요.




▲ 마을 어르신들이 그물을 손질하는 선창 그늘밑에서 염치없이 고무대야을 식탁 삼아 바다동물 섭취에 몰입 중인 뱃사공 부녀



돌아오던 길에 오대산 월정사로 향했습니다.
월정사는 절집을 보러 간다기 보단 숲길을 보러 즐겨 가는 곳입니다.
뱃사공은 본래 카톨릭 신자였고 지금은 그마저도 발길을 끊은지 오래지만 왠지 월정사 숲길에 들면 알 수 없은 종교적 감동을 받습니다.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발딛어 봐야 할 숲길이고 또 그 유명세 덕에 씨에프에도 종종 등장하는 곳이지요.

몇 백년은 족히 넘는 나무들이 쭉쭉 하늘로 솟아 있는 길을 걷고 있으면 인간이 보지 못한 세월을 보고 느꼈을 그 숲의 깊은 기운과 소통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현재를 사는 인간과 과거를 사는 나무가 한곳에서 공존하는 타임캠슐에 들어선 듯한 묘한, 시공의 경계를 넘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매우 생경한 체험 같은..
'천년의 숲길'이라는 얘기가 바로 이러한 뜻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절집이라는 종교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로는 더없이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면서,
이런 느낌은 어떻게 보면 월정사라는 큰 절집이 주는 감동보다도 실은 더욱 종교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뱃사공에게는 말이죠.




▲ 종교적이다 할만한 월정사 전나무숲길



▲ 나의 사랑하는 딸아, 아빠가 나무가 되어 줄께.



교과서에 등장하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지나 대웅전에 들어 딸아이와 함께 백팔배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보시면 불자도 아닌 우리 부녀를 보고 쟤들이 왜그러냐 하시겠지만,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걸어 대웅전에 들어 백팔배를 하는 것은 우리 부녀가 이곳에 오면 늘상하는 순례 같은 것입니다.
아빠와 함께 송글송글 땀을 흘리며 백팔배를 하는 딸아이가 늘 대견스럽습니다.
허벅지가 조금씩 묵직해졌지만 바닥에 엎드려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대웅전 문턱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개운하고 상쾌했습니다.


백팔배를 마치니 저녁 법고가 산중에 울려 퍼집니다.
법고를 치는 스님들도, 탬플스테이에 참여한 불자들도, 또 뱃사공 부녀처럼 구경 삼아 들른 관광객들도 모두 법고와 범종, 목어, 운판이 내걸린 누각을 향해 저 나름의 생각에 젖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모습이 흡사 국기하강식 같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마당 한켠에 있는 샘물에서 목을 축이고 있자니 음.. 더 이상 바랄것이 없더군요.




마지막 범종이 울리는 대웅전 마당을 뒤로 하고 다시 천년의 숲길을 걸어 나오는데 딸아이가 다리가 아픈지 말했습니다.

'아빠, 나 날고 싶어'
'왜?'
'그럼 저 길 끝까지 빨리 갈수 있잖아'
'그래, 그럼 아빠가 날게 해 줄께'

그리구선 주저앉아 등을 내미는 뱃사공에게 딸아이가 피식 웃으며 업혔습니다.

'편하지, 나는 것처럼?'
'응'

아까 백팔배 하며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아빠하고 똑같은 소원을 빌었을테니까요.

뱃사공은 딸아이의 향긋한 숨을 뒷머리로 맡으며 하늘을 날듯 숲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지요.

'마음 깊이 사랑하는 나의 딸아, 이 숲길처럼 세월이 흘러도 아빠가 한없이 사랑했음을 기억해다오..'




이천구년 여름.
난장이아빠 뱃사공 씀.



# 알아두면 좋은 정보

- 소돌항에 가시면 아들바위 옆에 조개집들이 늘어서 있는데요, 어촌계 좌판은 그곳이 아니라 방파제로 이삼십미터 가시면 아주머니들이 큰 대야에 물고기들을 넣어두고 그자리에서 회를 썰어주십니다.
보통 3만원정도치씩 담아두는데 너무 많다고 하면 2만원정도에도 적당량을 사실수 있습니다.

-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걸으시려면 매표소 직전 공중화장실 옆 주차공간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들어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차를 가지고 월정사 주차장까지 가시면 전나무숲길을 내려왔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불편이 있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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