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을 기억하다, 내 청춘의 어느 날을 기억하다
| HIT : 1,386


“서른 즈음에, 서른이 지난 후에” - 김광석을 기억하다, 내 청춘의 어느 날을 기억하다

  

그게 어느 해였던가.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이었을 때니 1998년이었던가. 그게 12월이었던가. 벌써 기억은 흐릿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 대부분은 아예 기억 밖으로 밀려났고, 얼굴도 희미하다. 출판사 편집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차로 노래방에 갔다. <서른 즈음에>를 예약했다. 전주가 흘러나오고 마이크를 잡았을 때, 한 여자 편집자가 이렇게 말했다. “조 선생님, 이제 그 노래 부르실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네요.” 그때 내가 항변했던가. 나는 만으로 겨우 서른여덟일 뿐이라고. 내겐 그 노래를 부를 날이 창창하게 남아 있다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 슬픔은 언제나 형벌이다.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누가 슬픔을 즐기겠는가. 떠난 자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쓸쓸한 법이다. 그렇잖아도 이미 충분히 쓸쓸하고 허전한 삶인데, 떠난 자를 기억하는 슬픔까지 더해야 하는가. 더해야지 어쩌겠는가. 그게 살아남은 자가 치러야 할 대가인 법인데. 김광석, 내 청춘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을 이름 하나. 내 청춘이 흘러간 길마다 함께 흘러갔던 많은 노래들.....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아픔까지 더해야 한다.

  

그해 봄 런던의 날씨는 눈부시게 밝았고 눈이 침침하도록 흐렸다. 잠깐 햇살이 비친다 싶다가 시커먼 구름이 융단폭격을 가했다. 남들이 스무 살 시절에 통과한 꿈을 이뤄 보려고 서른넷에 런던으로 날아갔다. 복대에 달랑 2천 달러의 여행자 수표를 담고서 최소한 2년은 거기에 머물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날아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공부를 해보겠노라고, 웨스트엔드의 극장들도 순례하겠노라고, 영어나 불어로 글을 써서 모국어의 한계를 벗어난 동유럽 작가들을 따라해 보겠노라고, 얼토당토않은 야망을 품었다.

꿈이 와장창 깨지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런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일자리의 급료는 그 꿈을 이루기엔 턱없이 작았다. 지하철을 50번쯤 타면 주급이 다 소진되었다. 그리고 런던은 차가웠다. 오, 영국인의 그 쌀쌀맞음이라니!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은 날씨를 닮는지! 겨우 석 달 만에 끝나버린 내 런던 시절, 유일한 기쁨은 저녁의 산책이었다. 밤 9시쯤이 되어야 겨우 어두워지는 런던의 봄날 저녁 시간, 하루치 노동을 끝내고 나면 집 근처의 작은 공원으로 도망쳤다. 이리저리 숲속 길을 산책하다가 지치면 저녁 햇볕 좋은 벤치에 앉아 들고 간 시집을 읽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날도 아 참 햇살이 좋다 싶어 나선 공원에서, 건너편 벤치에 앉은 사람과 눈인사를, 그리고 말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하이! 하이! 그의 첫 질문을 지금도 기억한다. “무슨 책을 읽고 있어요?” 시집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가 말했다. “나도 시집을 읽고 있는데요.” 그 날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의 시인에게 영원한 축복이 있으리니! 그가 물었다. 한국에서 난 뭘 하고 살았느냐고. 나도 시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내 시집도 있느냐고. 아직 없다고 대답했다. 내 시 중에 영어로 번역된 게 있느냐고 그가 물었다. 몇 개가 있다고 대답했다. 언제 다시 만나서 그 시를 들려달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내 런던 시절에 남겨진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결국 런던에서의 일을 때려치우고 런던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내겐 갈 곳이 없었다. 영국 친구가 내게 말했다. 떠나는 날까지 자기 집에 와서 묵어도 된다고. 자기 집 거실에 소파 베드가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된다고. 그래서 그의 집에 며칠을 묵게 되었다. 그때 내 배낭 속에 CD 스무 장쯤이 들어 있었고, 그중에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집이 들어 있었다. 어느 저녁, 와인을 마시다가 그가 말했다. 한국 노래를 들어보고 싶다고. 김광석을 그의 오디오에 걸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김광석의 노래가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노랫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 가수의 목소리에선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고. 그 목소리엔 사람을 울리는 슬픔이 담겨 있다고. 그건 언어를 뛰어넘는, 국경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힘이라고. 그리고 그가 내게 물었다. 그 CD를 카셋트에 복사해도 되겠느냐고. 서울에 돌아가서 시간이 생기거든 노래 가사들을 번역해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나는 오디오에서 CD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서울에 돌아가서 또 사면 된다고, 서울에 돌아가면 자켓을 보내주겠노라고, 노랫말도 잘 번역해서 보내겠노라고, 내게 편히 쉴 수 있는 지상의 방 한 칸을 내어준 사람에게 보답할 게 그 CD 한 장뿐이라는 게 미안하다고, 그래도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선물해 줄 수 있어서 참 기쁘다고, 말하면서 그의 손에 CD를 쥐어주었다.

  

1994년 봄의 일이었다. 런던을 떠나 1년 반, 세상을 떠돌다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아침 일찍 친구의 전화가 왔다. 소식 들었느냐고, 김광석이 죽었다고.... 그 순간 내가 런던의 친구를 제일 먼저 떠올렸던 건 이상한 일이었을까. 그나마 간당간당 가늘디가늘게나마 남아 있다고 믿었던 청춘의 끈이 스윽 잘려나갔다고 느껴졌던 것도 이상한 일이었을까. 새로 산 <다시 부르기> 1집을 들으며 슬며시 눈꺼풀에서 도망쳐 흐르던 눈물도 이상한 일이었을까.

그 서러웠던 아침으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런던의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에게 <다시 부르기> 2집과, 김광석이 죽은 뒤에 세상에 나온 라이브 앨범 두 장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에게 전했다.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노라고. 왜 어떻게 죽었느냐고 런던 친구가 물었을 때, 이런저런 소문들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믿는 건 한 가지뿐이라고, 삶이 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답해 주었다. 김광석의 CD 석 장이 모두 플레이되는 동안 우리는 포도주병을 비웠고, 새 잔을 채울 때마다 건배했다. 세상을 떠난 가수를 위하여, 그가 남겨준 노래들을 위하여,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시간이 흘렀다. 1997년 런던 친구와 재회한 후로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가끔 김광석의 노래들을 듣고 있을까.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면 서른 시절의 중턱에서 외롭고 지친 채로 자신의 둥지로 날아와 잠시 쉬었다 떠났던 어느 이방인을 기억할까. 그럴 때면 그도 가슴 어느 한구석을 찌르는 작은 통증을 느낄까.

사진 작가(作家), 사진으로 집을 짓는 이. 임종진이 김광석으로 책을 낸다. 참! 인연의 고리들이라니. 대학로의 좁아터진 소극장 콘서트에서 땀 뻘뻘 흘리며 보았던 그날의 김광석도 어쩌면 그 책에 있을지도 모른단다. 임종진과 나는 서로 모른 채 지나쳤을 것이고, 세월이 흐른 뒤에 “어? 형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날은 아닐지 몰라도 그 극장에 있었던 건 맞아!” 그런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담을 이야기하게 되다니. 심지어 이 알량한 곁다리글로 나도 이 책에 동참하게 되다니!

다시 런던에 가는 날, 나는 이 책을 선물로 가져가려 한다. 임종진이 사진으로 다시 노래 부른 김광석의 시간들. 떠나간 자를 기억해야 하는 슬픔도 때론 선물이 되고 축복이 된다. 그 기억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다면 말이다. 대학로의 좁아터진 작은 극장에서 무릎을 맞대고 땀 뻘뻘 흘리며 노래를 따라부르던 나와 눈 맞추던 김광석을 기억한다. 어느 늦은 밤, 대학로의 어느 골목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김광석을 기억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팬에게 반가이 악수하며 환히 웃어주던 김광석을 기억한다. 이제 그 기억들을 다시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참 큰 선물이다. 참 고마운 선물이다. 런던에 돌아가는 날, 이 책을 펼쳐놓고,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다시 와인 잔을 부딪치려 한다. 기억을 위하여 건배! 살아남은 우리의 기쁜 날을 위하여 건배!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청춘의 날들을 위하여 건배!



**************



오래 전부터 종진이는 김광석의 사진책과 전시회를 준비해왔다.

계획대로였다면 작년 2월쯤에 이미 벌어져야 했을 책과 전시였다.

인생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종진이의 책을 위해서 써준 추천사가 실린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사진전을 먼저 열게 되었나보다....

어젯밤, 이음아트 서점에서 사진 디스플레이를 하는 종진을 지켜보았다.

한밤이 되어서야 일이 끝났고, 디스플레이를 도와준 종진의 후배들, 그리고 이음아트의  상준이와 함께

곱창집에서 곱창 안주로 소주 한 잔 기울였다.

새벽 4시까지, 택시 할증료를 물지 않아도 되는 시간까지 함께 있었던 그들과의 시간이

또한 청춘의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종진이의 두번째 사진전 '광석이형' 전시회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책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종진이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캄보디아로 날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종진아, 축하한다, 수고했다...토닥토닥....


<네이버 joon6078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전효진
아직 다 자라지 못했던 겨울즈음 마음에 품었던 그 사람으로 인해 김광석님을 알게 되었었지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

09·08·12 18:39 수정 삭제


상처에는 김광석형의 목소리가 약이지요.
종종 덧나게 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누구도 흉내낼수 없다는 그의 슬픈 목소리를 다시 듣지 못한다는 것이, 가끔, 아플때가 있습니다.

09·08·12 21:54

  문학은 김광석을 연모한다 884
  김광석 노래의 힘 1148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