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리운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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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원 씀


대학 2학년 때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급속한 민주화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런만큼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시위가 벌어지곤 했다. 흔히 가투(가두투쟁)라고 불리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는 정국을 이른바 최루탄 정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시기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 종로 한복판 피카디리 극장 옆에 ‘미리내’라는 이름의 소극장이 있었다. 거기서 ‘민족극 한마당’이라는 행사가 2개월 동안 열리고 있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극단 한강을 비롯해 전국에서 활동하던 마당극패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공연을 하던 그런 행사다.

당시에는 사회비판 내용이 강했던 이런 마당극은 열린 공간에서 쉽게 공연할 수 없었다. 정부 당국의 탄압을 피해 주로 대학 내나 노동 현장 등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당극 행사가 종로 한복판에서 공개적으로 열리고 있으니 많은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개인적인 관심도 관심이었지만 학교 학회에서 학술지를 만들기 위해 이 공연을 관람했다. 학회 돈으로 2개월치 티켓을 끊고 거의 모든 공연을 보면서 리포트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민족극 한마당’을 축하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노래패였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난 어느 순간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조차 없는 충격을 받았다. 내게 그런 충격을 줬던 이는 다름 아닌 김광석 형과 안치환이었다. 당시 노찾사의 멤버였던 두 사람이 ‘광야에서’라는 노래를 부를 때 온몸에 전률을 느꼈고,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격정을 느꼈던 것이다.

별로 고민할 틈도 없었다. 공연이 끝난 후 곧바로 대기실을 찾아갔다. 아마도 문승현 씨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짜고자 노찾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사무실로 와서 오디션을 받아 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오디션을 받지 못했다. 오디션을 받기로 한 날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했었기 때문이다.

여러 해가 지났다. 1995년 8월이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몇년이 되지 않았는데 우연히 김광석 형을 취재할 일이 생겼다. 그 때 김광석 형은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다. 학전극장은 김민기 씨가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김광석 형은 매년 8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동안 꼭 이 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김광석 형의 공연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아주 작지도 않은 학전블루는 한 자리도 비지않았다. 원래 김민기 씨는 아무리 관객이 많아도 통로 등에 보조의자를 놓는 일이 없었다. 돈 몇 푼 더 벌자고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김광석 형의 공연은 예외였다.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더 김광석 형을 만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난 김광석 형을 취재하기 위해서도였지만 연극을 하던 친동생이 그 때 학전 극단 소속으로 ‘지하철 1호선’ 등을 공연한 탓에 공짜로 김광석 형의 공연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학전 단원들이 김광석 형 공연의 스태프로 활동했었다.

공연 도중 한 관객이 무대로 뛰어올라갔다. 그의 손엔 서류봉투에 싸인 소주 한 병과 구워지지 않은 오징어가 들려있었다. 그는 구미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였는데 김광석 형과 꼭 한번 술을 마시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잠시 공연장이 술렁이기는 했지만 김광석 형은 그 노동자를 무대에 앉힌 후 소주병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노동자에게 병을 다시 내밀었고, 곧 뒤에서 연주를 하던 세션맨들에게도 그 술병을 돌렸다.

그날 저녁 난 내 동생과 함께 대학로의 한 허름한 주점에 갔다. 이미 그곳엔 김민기 씨를 비롯해 김광석 형과 학전의 단원 여럿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끼어 앉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김광석 형과의 자연스런 인터뷰를 유도했다.

하지만 김광석 형과의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그러기엔 김광석 형이 너무 취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김광석 형의 모습이 사라졌다. 몇몇 단원들이 잔뜩 걱정하면서 그를 찾아 나섰다. 나도 따라 나섰다. 그는 서울대 의대 후문 쪽에 서서 길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로니에 공원 건너편이다. 이미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 거리는 폭주 오토바이로 가득 찼었다. 그 한 가운데서 김광석 형은 위험천만하게도 폭주족들을 향해 소리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껴라, 제발 아껴라. 니들의 청춘이 그렇게 허비되기엔 니들이 너무 아까운 젊음이다. 그러니 제발 막 버리지 말고 아껴라.”

그의 목소리를 절규였고, 분노였고, 그리움이었다. 자신의 옆을 무섭게 스치고 지나가는 오토바이들을 쳐다보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난 적어도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는 그날 낮에 자신과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싶어 구미에서 올라온 청년 노동자를 떠올렸을 것이고,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주를 들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그 용기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불나방처럼 아무 생각없이 세상이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던 오토바이와 거기에 탄 청춘들을 가슴에 묻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난 김광석 형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했지만 김광석 형의 기사를 쓰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미 술 취한 그의 입에서 읖조리는 말들 속에 내가 듣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다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채 5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난 김광석 형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김광석 형의 12주기란다. 솔직히 잊고 있었다.

난 김광석 형에게 ‘형’이라고 부르라는 허락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내 일생에서 그를 대면했던 것도 3번 정도였고, 말을 나눠 본 것은 고작 한번 뿐이었다. 그는 아마 죽을 때도 내 이름 같은 것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난 김광석을 김광석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구미에서 소주 한 병을 들고 김광석 형을 찾아왔던 그 청년 노동자도 무대에서 “김광석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김광석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허락받지 않고도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가 영면의 세계에서 이 땅의 코미디들을 즐기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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