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이 형, 당신의 노래는 애달픈 양식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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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이 형, 당신의 노래는 애달픈 양식

-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1987년 10월13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앞은 때아닌 장사진이 펼쳐졌다. 대개 젊은 대학생들 중심이었던 인파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그 공연은 몇 달 전, 6월 항쟁 이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노래들로 채워져 있었다.
4·19 때 죽어간 넋들을 위한 노래 ‘진달래’, 김민기의 ‘친구’, 일본 제국주의자는 물론 그 후 여러 집권자들을 성나게 했던 시에 노래를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리고 김지하의 시에 처절한 가락을 붙인 ‘녹두꽃’ 등등.

공연의 막바지 무렵에 앞서 ‘녹두꽃’을 불렀던 가수가 다시 등장했다.
그가 새로이 부른 노래는 ‘이 산하에’였다.
1절은 갑오농민전쟁, 2절은 3·1운동, 3절은 북만주 항일무장투쟁을 형상화한 이 장중하면서도 격정적인 노래를 그는 매우 유려한 미성으로 소화해 냈다.

“청년의 노래가 시작되자 객석은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왜소한 체구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수면에 파도를 일으키듯 퍼져 나갔다.”(이윤옥, <김광석 평전> 중에서)

왜소한 가수의 이름은 김광석이었다.
지하에서 흐르던 노래의 수맥을 지상으로 끌어올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김광석은 노래 인생의 첫 무대를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다. 88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에게 김광석은 그룹 ‘동물원’의 가수 김광석일 뿐이었기 때문이다.(동물원 1집은 1988년에 나왔다.)
그는 그룹 동물원의 메인 보컬로서 대중가요에 입문했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거리엔~’을 흥얼거리며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불 아래 옷깃을 세워’ 걷게 만들었다.
나 역시 그의 팬이 됐다.
어느 날 선배 한 명이 ‘광석이 형’과 술자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업까지 제치고 달려갔는데 급한 일이 생겨 자리가 파했다는 얘기에 실망을 금치 못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 김광석이 죽었다. 술 먹자”

이후 김광석의 삶의 궤적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를 90년대의 ‘가객’(歌客)으로 꼽는다. 90년대의 절반은 그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 안에서 빛나고 스러지기까지의 짧은 시기와 일치한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충격파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 대상이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에게 국한된 측면이 있었던 반면, 김광석의 노래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넓고도 풍성하게 세상을 덮었다. 중학생부터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그 가슴에 낙엽처럼 수북하게 쌓일 수 있는 노래들이었다.
유행을 타고 사라지는 노래가 아니라 잊힌 것 같다가도 누군가의 구두 발자국 위에, 넘기기를 까먹고 방치된 달력 숫자들 속에서, 뜻밖에 서랍에서 삐져나온 옛 사진 한 장에서 불현듯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그런 노래들이었다.

애인이 불러준 ‘이등병의 편지’
내 얘기 같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실연의 아픔 달래준 ‘거리에서’
그라는 존재는 일상과 추억 속에
밤눈처럼 소리없이 쌓여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부하 자르고
노래방에서 엉엉 울던 신사 뒤로
울려 퍼지는 “일어나 일어나”
조그맣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
그의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었다

1996년 1월6일 그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던 즈음, 나는 입사한 지 정확하게 1년이 되고 있었다.
거의 욕먹는 기계이자 하루라도 사고를 내지 않으면 손발에 가시가 돋는 서툰 에이디(AD: 조연출)로 하루하루를 나고 있었다.
그래서 김광석의 부고를 들은 그 순간이 점심 먹던 때였는지 아침나절이었는지, 또는 촬영 가는 봉고차 안이었는지 사무실에서였는지, 그 기억은 희미하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듣고 내지른 일성은 명확하게 기억한다.
허탈하지만 처절하게 내뱉은 한마디. “말도 안 돼.”

그날 퇴근 무렵까지 내 삐삐에는 10개가 넘는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 다음과 같은 음주 청탁이었다.
“아, 김광석이 죽었다. 술 먹자.”
야근이 일상이었고 하루걸러 밤을 새우던 무렵이라 그 절절한 술자리의 유혹들을 뿌리쳐야 했으나 그래도 그날 나는 술을 장히 먹을 수 있었다. 회사 안에서도 김광석의 죽음에 넋이 반쯤은 나가 버렸던 군상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와 피디(PD)들 해서 한 대여섯쯤 되었을 것이다.
편집실 밖 책상에는 소주와 오징어, 새우깡 등으로 구성된 조촐한 술판이 마련됐고 한 명이 굴러다니는 시디플레이어에다가 책상에 보관중이던 김광석의 노래들을 담았다.
그때 처음 흘러나왔던 노래는 ‘사랑했지만’이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이 노래를 함께 불러 본 사람들은 안다. 대개 이 대목에서 이 노래는 독창에서 합창으로 전화한다는 것을.
그때도 그랬다. 술잔을 든 채, 또는 담배를 물고, 아니면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고 잠자코 듣던 사람들의 목청이 홀연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먹먹하게 내리깔렸다.
“그대를 사랑했지만.”

스물일곱에서 서른다섯가량의 청춘이라 부르기는 뭐한 나이들로 구성되었던 편집실의 군상들은 그렇게 김광석의 노래에 휩쓸리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난무했던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추억들.
신기하게도 김광석의 노래에 얽힌 추억 하나, 아니 대여섯개씩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입대하는 애인이 불러주는 ‘이등병의 편지’를 듣다가 주저앉아서는 입대하는 모습도 못 보고 울었다는 작가.
‘그녀가 처음 울던 날’처럼 애인과 헤어졌다는 선배, ‘거리에서’를 백번쯤 중얼거리며 실연의 아픔을 줄곧 걷는 것으로 풀었다는 피디.
가편집본을 지워 먹고 선배한테 테이프 케이스로 맞던 날 기분 푼답시고 ‘일어나’를 흥얼거리다가 갑절로 혼났다는 에이디.
김광석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살뜰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의 일상과 추억 사이로 밤눈처럼 소리 없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새삼 다시 깨달았다.

칠순 할머니도 사랑했던 ‘사랑했지만’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그다지 부르기를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수동적인 느낌이 싫었다던가.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다는 그 가슴살 저미는 아픔이 굳어버린 느낌의 노랫말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오히려 더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 참가하신 칠순 할머니께서 24년생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 비 오는 어느 날 우산도 없이 장 보고 오는 길에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내리는 비도 잊은 채 서서 들으셨답니다. ‘사랑했지만’이라고 하시더군요. 감정은 나이와는 상관없다고들 하면서도, 할머니나 부모님께서는 날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무의식중에 단정 짓고 잘 이야기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지요. 저 또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할머니의 잊었던 감정을 되살려준 노래이기에 조금 더 열심히 부르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복학했을 즈음(1992년쯤) 동아리방에서 인기 절정의 노래였던 ‘외사랑’도 그랬다.
짝사랑과 외사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짝사랑은 그래도 상대가 알고 있지만 외사랑은 상대도 전혀 모르는 채 내보일 자신조차 없이 혼자서만 삭이는 사랑이다.
실패한 사랑의 발톱에 두어 번쯤은 찢겨 본 경험이 있는 청춘의 심장들에게 김광석의 애절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 노래는 청량제이자 진통제였고 때로는 최루액이기도 했다.

김광석은 언젠가의 콘서트에서 ‘외사랑’ 때문에 한 여성 노동자 팬으로부터 동화책 한 권을 선물받은 사연을 얘기한 적이 있다.

어려서 서울에 와 공장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던, 그 시대에 흔했던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정신없는 노동과 잔업 철야 속에서 문화생활이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녀에게 어느 날 공장장이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김광석 콘서트 티켓이었다.
그녀는 김광석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공짜 티켓을 썩힐 수 없어 콘서트에 왔다가 감동의 물결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그녀를 울게 만든 노래가 ‘외사랑’이었다.

“내 사랑 외로운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지만/ 마음 하나로는 안 되나 봐요/ 공장의 하얀 불빛은/ 오늘도 그렇게 쓸쓸했지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내 마음같이 울고 있네요.”

그때 그녀는 노랫말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꽁꽁 숨겨둔 속내를 읽어 주고 위로해 준 것이 너무도 고마웠고 그녀는 동화책 한 권에 그 사연을 단정히 적어 선물했던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는 그렇게 친절했다.
냉수를 수십 사발 퍼부어도 식지 않는 가슴의 불덩이를 조곤조곤 달래며 가라앉히고, 선인장으로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을 것 같은 갑갑한 가려움을 매만지고, “아프지? 아픈 거 알아. 실컷 아파해. 그것만은 우리만의 권리 아니겠니? 나도 아프거든”이라고 등을 두드려 주는 것 같았다.
듣는 사람의 정신적 무장을 해제하고 나아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퍼올리는 각혈을 하고 싶게 만들었던 그의 노래의 힘은 듣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으로부터 노래의 생명을 빌리고 그것으로 다시 그들을 위무했던 친절함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녹음한 ‘부치지 못한 편지’

김광석이 허망하게 떠나고 난 다음해, 1997년의 세모는 무척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한국을 엄습했던 것이다.
사정없는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온 나라를 휩쓸고 다녔고 평일 등산로에는 양복 입고 구두 신은 신사들이 넘쳐났다.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그래도 송년회들은 단출하게나마 열렸다.
그래도 2차는 가야 했고 노래방에서나마 악들을 쓰면서 즐거운 양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나섰는데 특이한 모습에 발길이 묶였다.

한 중년 신사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직감이 왔다. “아, 명퇴 됐구나.”
술에 취하면 감정이 좀 격해지게 마련이지만 내 눈시울마저 공감으로 뜨거워질 정도의 서러운 울음이었다. 마치 만취 후 음식을 게워 내듯 끅끅거리는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한 명의 취객이 가세했다.
그는 조금 젊은 30대 중반쯤 되는 부하 직원이었다. 그는 중년 신사를 찾으러 나온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라고 중년을 위로하는 듯하던 30대 취객은 뜻밖의 고함을 질렀다.

“부장님이 왜 울어요. 부장님 죄 없어요. 부장님이 자른 것도 아니잖아요.”

중년의 신사는 부하 직원을 부둥켜안고 다시 통곡을 했다. ‘미안해, 미안해’를 연방 토해내면서.
짐작하건대 중년의 신사는 해고된 것이 서러워서 운 것이 아니라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부하 직원을 잘라내야 했던 쓰라림을 못 이겨 통곡한 것이었다.
“미안해”와 “부장님 잘못 아니잖아요”를 몇 번씩이나 교환한 끝에 둘은 다시 그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흘러나온 노래가 있었다. 김광석의 ‘일어나’였다.
해고된 것으로 짐작되는 30대 부하 직원은 망가진 목소리로 하지만 열정적으로 ‘일어나’를 부르짖었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노래 가사는 마치 1년 전 돌아간 가수의 예언 같았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하지만 중년 신사가 토해 내던 울음 같던 그 노래는 방 안에 있던 모두의 합창으로, 씩씩한 함성으로 바뀌어 불투명한 유리창을 넘어 들려왔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그 속에는 중년 신사의 목소리도, 씩씩한 해고자의 목소리도 어우러져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생전에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형’ 자를 붙이며 중얼거렸다.

“광석이 형 고맙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노래는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그 노래는 흡사 김광석 본인에 대한 추모곡처럼 들린다.
그의 노래의 시작은 어두운 시대의 험로였다.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김광석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했고, “기나긴 밤, 압제와 죽음과 투쟁의 밤”을 부르면서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로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개인개인의 아픔과 슬픔은 언제나 “그의 노래”였다.
조그맣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 그의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었고 아무것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커다란 빛이 되는 조그만 읊조림이었다.
사람들에게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라고 ‘선동’했던 그의 노래는 끝내 갑작스레 너무도 갑작스레 주저앉고 말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함께했던 90년대의 추억은 그를 사랑했던 이들 모두에게 화인(火印)처럼 선명하게, 유성물감처럼 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김광석 열풍을 통해 확인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빛과 그림자 403
  [산하칼럼] 1996년 1월 6일 끝내 일어나지 못한 가객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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