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뜨거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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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을 둘러싼 모순들을 변증법적으로 일거에 해결해준 그의 노래
죽음 뒤 마주한 방송국 카메라, 30분간 땀흘리며 허탕 치다

▣ 김연수/ 소설가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광호는 아니었지만, 나도 그 비슷한 짓을 한 적은 있다. 김광석이 죽은 해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대중음악평론가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말과 마찬가지였으나, 아무려나 어찌어찌하여 나는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어느 음악 케이블방송사의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요는 김광석의 자살과 음악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길어야 몇십 초 정도 나갈 인터뷰였다.


“야, 가서 찬물 좀 가져와.”


촬영이 시작되고 15분 정도가 지나자 카메라맨이 손부채질을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결코 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땀을 흘리는 내게 PD가 달래듯 말했다. “그냥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해볼게요.” 내가 너무 심하게 떨어 촬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PD의 권유에 따라 깊은 숨을 몰아쉬며 나는 준비해간 멘트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김광석은 한국 모던포크의 적자로서…” 운운하는, 기실 평상시에는 잘 발음하지 않는 단어들로 이뤄진, 그다지 길지 않은 문장이었다. “친구에게 말하듯이, 친구에게 말하듯이”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맨이 들어왔다. 나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네가 카메라라면 나는 망원경이다.’ 그리하여 하도 많이 되풀이해서 말하는 바람에 아예 외울 정도가 된 문장, 그러니까 김광석의 음악세계와 그의 죽음의 의미를 짧게 요약한 문장을 마침내 모두 말하고야 말았을 때, PD가 옆에 있던 방송작가에게 소리쳤다. “야, 가서 찬물 좀 가져와.” 그날 나는 30분에 걸쳐서 대략 다섯 문장 정도의 인터뷰를 녹화했다. 이제까지 해본 방송 인터뷰 중에서 그게 제일 긴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인터뷰는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가족과 텔레비전을 보다가 겸연쩍은 마음에 내가 중얼거렸다. “광석이 형, 괜히 일찍 죽어서….”




△ 1996년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 그는 내 청춘의 모순을 해결해주고 먼저 떠났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대학생이었던 내 오른쪽 귀로는 동물원의 노래가, 왼쪽 귀로는 노래를찾는사람들의 노래가 늘 들렸다. 내 음악적 감수성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그 정도였다. 그건 어쩌면 청춘의 정치적 스펙트럼이랄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연애와 운동 사이를 한없이 오가는 변증법적인 움직임. 동물원과 노래를찾는사람들 사이에 김광석이 있었다. 그러므로 김광석의 노래에는 나를 비롯한 한심한 청춘들이 무턱대고 빠져들 수밖에 없는, 청춘을 둘러싼 그 모든 모순들을 일거에 변증법적으로 해결하는 명쾌함이 있었다. 우리를 열광시킨 것은 <그루터기>를 부르던 그 입술로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공적 운동과 사적 연애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그 참으로 아름다운 일원론의 세계.

벌써 김광석이 죽은 지가 10년이 됐다면, 그가 죽은 해는 1995년이었나? 아니면 1996년이었나? 1990년대의 일을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공적 삶과 사적 삶이 아름답게 조우하던 순간은 다만 몇 년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김광석이 자살하던 즈음에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일들에 골몰하고 있었다. 광장은 텅 비었고, 잔치는 끝났으며, 정태춘의 노래처럼 오래도록 종로에는 장맛비만 내렸다. 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업을 버리고 직장인이 됐다. 직장에 다니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찬물’을 마셔댔다.

그러다가 동물원의 김창기가 <하강의 미학>이란 음반을 냈다. 거기에 이런 가사를 지닌 노래가 있었다. “또 나의 삶은 아주 말끔히 포장되고 우리의 추억은 멀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떠나고 아침 출근길에 문득 너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짧은 순간 호흡이 멈춰질 듯하지만 난 단지 날 가끔 내가 원했던 대로 봐주던 널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인걸.” 한때 우리는 한없이 뜨거운 불들을 삼킬 수 있었지. 그때는 누구도 ‘찬물’을 마시지 않았지. 더 많은 뜨거움을 갈망했지.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건 김광석이 아니라, 그 뜨거움이라는 걸, 연애와 운동 사이를 한없이 반복 운동하던, 그 타협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석의 노래란, 그리고 결국 청춘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는 걸.

  슬픔을 무슨 재주로 연습하겠나 1112
  김광석 아릿한 떨림, 끝나지 않은…(한겨레신문)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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